살아가는 이야기

나의 친구 6. 25 참전 이야기

뉴도미닉 2010. 12. 1. 00:27

 

 

한심한 몇 명의 위정자들이 또다시 국민을 웃기고 있다.

 

천안함 사건이 엊그제 같았는데 북한은 또 연평도를 무자비하게 기습 포격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정부의 강력한 응징을 기다려본다.

 

얼마 전 미국에 사는 나의 친구 딕[Dick - Abner R. Williams의 애칭]의 부인인 Mrs. Williams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한국 기자가 그녀의 남편을 만나 6. 25 참전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었다.

 

엔지니어로 한국에서 근무할 때 알게 된 딕은 지금은 정년 퇴임하여 부인과 여생을 즐기고 있다.

수년 전 그리고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었다.

 

일부 위정자를 생각하며 인터뷰한 내용과 또 다른 미국 친구가 보내준 6. 25 사변 동영상,

벤프리트 장군의 일화 등을 엮어 부끄럽지만 여기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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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용사 Abner R. Williams씨의 이야기

 

 

해병대 1사단 소속으로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고

1978년 제3땅굴을 발견하여 그 공로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51년 6월 6일 19세 나이에 부산에 발을 디딘 에브너 알 윌리엄스씨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으로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자신이 속한 미 해병대 1사단 선배들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지 6개월후 부산에 도착한

윌리엄스씨는 4명으로 이루어진 소총수 팀의 사격지휘자로 도착한지 2일만에

춘천 근교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시작했고,

이어 현재 DMZ 에 위치한 도솔산 해안 분지에서 최대의 격전을 벌였다.

한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윌리엄스씨는 당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던

도솔산 지형도의 등고선을 하나하나 짚으며, 북한군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

상사가 북한군의 공격에 의해 쓰러져 들것에 실려 후송되던 모습,

포탄이 떨어져 수많은 동료들이 숨진 비극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윌리엄스씨는 “당시 적의 공격에 의해 쓰러진 동료를 구하려다 포탄이 떨어져

얼굴 전체와 팔에 파편이 튀어 피범벅이 되고 폭발음으로 인해 청각을 잃었다“며

“살아 돌아온 것 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해 당시 전투의 긴장감을 상기하는 모습이었다.

윌리엄스씨는 “전쟁 중 입은 상해를 두려움을 무릎 쓰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영예의 상처“라고

하며 미 정부에서 상해 군인에게 수여하는 퍼플 하트를  소개했다.

1953년 5월 9일 약 2년간의 참전을 벌이고 미국으로 돌아온 윌리엄스씨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으로 1969년 다시 한국땅을 찾았다. 엔지니어로 미군부대의 도로, 비행장,

관사 등의 건축, 설계 업무를 맡은 윌리엄스씨는 약 10년간 한국 생활을 하며

한국 문화, 음식과 친숙해 졌다.

또한 윌리엄스 씨는 1978년 휴전선 근교 남방 지대에서 북한이 불법으로 구축한 제 3땅굴을

발굴해 당시 노재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윌리엄스 씨는 “1970년대 한강에는 다리가 1개뿐이었고 한남동에서 한강을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었다“며

“한국이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에 대해 감탄한다“고 기뻐했다.

한편, “한국을 방문하면 참전용사 기념비를 비롯해 당시 전쟁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을 찾아간다“는

윌리엄스 씨는 “한인들은 오히려 전쟁의 역사를 잊고 사는 것 같다“며,

 “설악산에 가는 한국인 가운데 관광지를 찾는 사람은 많아도 참전용사를 기념하는

전적비를 찾는 사람은 없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윌리엄스 씨는 당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용감히 싸웠던 한국 해병대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윌리엄스 씨는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며

 “지금 대한민국이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시 많은 군인들의 희생과 피로 얻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윌리엄스 씨는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언을 되새기며 “이번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자유의 가치를 깨닫고 안일함에서 깨어나길 바란다“고 충고했다.

또한 윌리엄스씨를 비롯한 해병대원들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에서 희생한

180명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오는 11월 워싱턴에서 기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김효진기자 hjk@atlantachosun.com

 

 

 

Abner R. Williams씨 ▼

 

 

 

▲ 에브너 알 윌리암스씨가 미정부가 수여한 퍼블하트와 한국정부가

수여한 감사장을 보이고 있다.

 

 

 

▲ 한국전 당시 같은 소총수 팀 동료와 찍은 사진

[오른쪽이 에브너 알 윌리암스씨]

 

 

 

▲ 에브나 알 윌리암스씨가 도솔산 등고선을 짚으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 한국전 참전 용사로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로부터 받은 메달들

 

 

 

 

 돔이 만난 Mr.& Mrs. Williams

 

옥천 순두부집에서

 

양평 Hill House에서

 

Walker Hill 에서

 

 Walker Hill 에서

 

 

 

 

 

한국전쟁 6.25 60돐 특집

-----  서  론 0  -----

 

Korean War (Part 1): The Big Picture- 한국전쟁의 전반적인 모습

 

 

 

 

Korean War (Part 2): The Big Picture- 한국전쟁의 전반적인 모습

 

 

 

 

Korean War (Part 3): The Big Picture- 한국전쟁의 전반적인 모습

사회와 산업

 

 

*****    부록     *****

 

Korea: The Big Picture (Part 1) 대한민국

 

 

 

 

Korea: The Big Picture (Part 2) 대한민국

 

 

 

 

지도로 보는 2000 년 동안 동아시아 역사

동북아의 정치변동지도

 

History map of East Asia for 2000 years

 

 

  

***** 벤프리트 將軍 이야기 *****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기수[機首]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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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워커 장군의 후임이었던 릿지웨이 장군이
맥아더 장군이 해임됨에 따라

UN군총사령관으로 영전한뒤 그 후임으로 부임한 벤프리트 미 8군사령관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해외 근무를 마쳤음으로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여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리고 그 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2일...

 이 훌륭한 군인은 압록강 남쪽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한 후
적을 향해서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소식이 끊겼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 8군 사령관 밴프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지미 밴프리트 2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 되었고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지미 벤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하다.”

 

라고 아버지가 아들 구출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접 한국군 부대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 명신 장군의 증언이다.

며칠 뒤 부활절을 맞아 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이 곧 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밴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을 벗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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