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그림이 있는 에세이160

뉴도미닉 2011. 3. 2. 00:51

 

 

           2011-02-13

           그림이 있는 에세이160 

 

                  

             명제: 작업 1992년 작 30 F Oil on canvas

 

 

               기도란 무엇일까?

               원(願)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인내하고 원함에 자신을 채찍질하며

               노력을 하면서 이루어질 것이란 믿음으로 내 마음에 담고 행하려는 마음이 아닐까. 절절한 원(願)함이

                       나오는 때는 우리에게 고통과 커다란 시련이 왔을 때이다.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울 때 절대자에게 간절하게

                       원함을 청하고 그분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생각하며 듣는 것을 기도라 하고,

                       그것을 깊이 마음에 새기며 생활하는 것이 믿음이 아닐까 한다.

 

 

               오늘 성당에서 2월8일 서품 되신 새 신부님의 첫 미사가 있었다.

               신학교에 들어간 지 10년 만에 신부가 되아버지 신부님, 그동안 돌봐주신 신부님들과 부모님, 그리고

               기도해준 많은 신자를 모시고 드리는 은혜로운 첫 번째 미사! 외할머니의 원함이 사제(司祭)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는 새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며 신부님이 되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도와 헌신의 사랑으로

               준비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믿음은 전적으로 절대자에게 의탁하며 바라고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성가대석에 앉아 내려다보면서 나의 원함도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누구나 원함이 있을 것이다. 그 원함이 신앙 안에서 이루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삶에서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삶 안에서 제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살아가며 사랑을 한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 116,12-13)를

               사제 생활의 중심이 될 성귀(聖句)로 골라 손수 유화로 그린 기념 상본을 제작하셔서 나눠주시며 기도해주길

               부탁하셨다. 그동안 새 신부님들이 주신 서품식 때의 상본을 받아들고 성귀(聖句)를 읽어보면 짧은 성귀 속에

               들어있는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를 들여다보는 것 같고 신부가 되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하느님 말씀을 청했을까 생각을 하니 그들의 용기에 비장함이 들어 있는 것 같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눈물이 났다.

 

 

               일생동안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때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자비와 측은지심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내 마음에 담으며 사랑을 청하는 기도!! 그러고 보면 기도는 무언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아닐까? 기도 중에 만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배려해야 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가슴에 담는......

               나도 한때는 아들이 사제가 되면 어떨까? 하는 원함이 있었다.

               세례를 받으려 교리공부를 할 적에 성경을 읽다가 바오로 서간을 읽으며 바오로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 <디모테오> 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이 첫 영성체를 하며 세례를 받을 때 <디모테오> 라고

               세례명을 지어주었다. 하느님을 증거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고.......

               아빠를 잃고 방황을 할 적에 하느님께 봉헌하는 심정으로 아들이 성소를 갖게 해달라고 <성소를 위한

               기도>를 마나 했는지 모른다.

               크게 방황하면 크게 깨닫는다고 생각을 기에 아들이 목표도 갖고 꿈을 키우기를 원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생활을 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좌절도 하고 가슴이 아파서 많이 울기도 하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받쳐 올 때면 죽을 것 같아 작업실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마련하고 숨었다.

               욕심의 크기만큼 슬픔도 배가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성소자의 어미로 살기에 너무나 부족하고

               신앙인으로 살기에도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달았다. 내가 낳았지만 나는 관리하고 보호해 줄 뿐

               아들을 키우는 것은 하느님인 것을 깨닫고 어느 날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젠 아들이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며 보람을 찾으며,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하고, 하느님께 쓰임을 받는

               도구로서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삶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것에서, 생각도 못한 곳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는 분이 하느님이신 것을 알기에 제대(祭臺)에서 미사를 집전하시며 강복을 주시는 새 신부님의

               두 팔을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내게 준비하신 축복을 받기 위해 나는 얼마나 준비하는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준비하고 기도하고 살았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많이 부끄러웠다.

               죄 많음에도 불구하고 은총을 청하는 내 뻔뻔함이......

 

 

 

  ** 작업: 테만 두르면 완성이 되어 도구로 쓰임을 받는 대광주리를 화면 가득 그렸다.

           서울로 이사를 와 모든 게 낯설고 힘이 들었을 때였다.

           내 안에 받아들이고 비우는 것을 현명하게 해야 한다는 마음에 바구니를 그렸던 게 생각이 난다.

           일부러 완성된 바구니를 그리지 않은 것은 내 삶이 완전하지 않아서였다.

           무엇을 담고 비워야 하는지는 지금도 나만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