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그림이 있는 에세이 173

뉴도미닉 2011. 12. 1. 23:47

 

 

 

2011-09-21

그림이 있는 에세이 173

 

 

                            

   명제: 정물 1981년 작 10F Oil on canvas

그림/글: 작가 정란숙

 

 

 

    우제길 선생님을 뵈었다. 아침잠을 깨우는 메시지에 선생님께서 코스모스가 핀 풍경과 함께 “가을입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요."라는 글을 보내오셨다. 단잠을 깨기가 싫어 한참을 누워 있다 일어나 “선생님!

세월이~ 참! 빨리 가고 무상합니다. 언제나 그리운 선생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만 있으셔요”라고

메시지를 보내며 언제나 먼저 소식을 보내시며 안부를 묻는 선생님과의 인연을 떠올렸다.

1980년 늦가을 서울살이에 지쳐 보따리 싸들고 무작정 집에 내려가서는 작업할 곳이 없어 방황하던 때에

  학교 미술실 한 귀퉁이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신 선생님! 다음 해 4월 결혼으로 도피할 때까지

  4개월가량을 조그만 석유난로에 손을 녹이며 그림을 그리고, 라면을 삶아 먹으며 그림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얘기를 하며 추운 겨울을 보냈던 때를 떠올리며 모임에 나가는 중이었는데 전화를

주셨다. 오늘 오후에 시간이 있느냐고 하시며 르네상스 호텔에서 모임이 있어 서울 올라오시는 중인데

  코엑스에 가 KIAF(화랑미술제) 전을 보면서 공부하자고 하셨다.  

 

   전시 때 서울에 잠깐 오셨다 일 끝나면 바로 내려가시고 나 역시 광주에 내려가도 짧은 시간에

일을 보고 올라와야 했기에 뵙기가 힘들어 가끔씩 안부전화나 할 정도였는데 모처럼 선생님과 함께

그림을 보면서 얘기를 할 기회를 가졌다. 내년 고희 전을 준비 중인데 만만하지 않고 여러 가지 조건이

안 맞다 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지방에 계시지만 개인 미술관도 갖고 계시고 인지도가 높아

유명 화랑 사장들이 선생님을 붙잡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한다. 그 넓은 공간을 둘러보는데 허리도

아파 오고 발바닥도 아프고, 많은 사람이 몰려다녀 혼란스러웠지만, 전시에 관한 얘기,

아는 선생님들 전시 작품을 보면서 내 작품에 대한, 선생님 작품에 대한 얘기들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눈에 띄는 작품은 별로 없었다. 몇몇 외국작가들의 조각과 작품이 눈에 들어올 뿐이고 대형 화랑들의

커다란 부스에는 인기 작가들의 작품만 걸려 있었다.

 

    내려가셔야 하는 기차 시간까지 근처에서 저녁을 먹으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속 깊은 얘기를 했다.

  혼자 그림을 그렸기에,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았기에 동료나, 선후배가 없고 선생님 또한 없으니 30년 넘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작가로서 혼자 살아내는 외로움을 얘기했다. 어린 나이에 일찍 화단에 나와

많은 선생님의 견제와 질시를 받으며 활동을 하고, 좋은 작품을 한다는 칭찬을 들으며 작업을 했지만

어떤 일에 있어서 결정적일 때는 선후배, 동료, 제자를 챙기는 속에서 여자 작가로 홀로서기 하는 게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고 내 위치도 중견작가 대열에 있는데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밥상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듯이 선생님들이나 동료에게 밥도 사고 차도 사면서 그들 사이에서 소통을 해야 하지만 내 처지가

  그렇지 않으니 점점 기회는 줄어들고 공모전심사며 상(賞)또한 그러하고, 하다못해 조그만 화랑에서

하는 전시도 끼리끼리 하는 것을 볼 때 외롭다. 끌어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작품으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게끔 이만큼 자리에 올라섰고, 좋은 작업을 하려고 노력을 하며 당당히 맞서왔지만 3년 가까이

작품을 팔지 못하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난감하다는 얘기들을 했다.

 

    내가 가난하기에 내 주변이 가난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지만 그림 그리는 작가이기 전에

여자로 보려 하기에 만남이 두렵고, 울타리가 없고 혼자이기에 만남이 쉽지 않으며 그동안 신뢰를

갖고 알아왔던 분들은 이제 연로하시고, 돌아가시고, 현역에서 은퇴를 하셔서 어디다 하소연할 때도 없다는

말에 내가 능력이 안 되어 너를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선생님께서도 당신이 느끼는 애로사항들을

나에게 풀어놓으셨다. 짧지 않은 시간에 저녁을 먹으며 얘기를 하다 보니 기차 시간이 다되어

  건강에 유의하며 작업하라고 하시며 내려가시는 선생님을 배웅하고 돌아서려는데 눈물이 나왔다.

 

    내 젊은 날, 그림에 대한 열정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에게 반 쪽 미술실 [교실 한 칸을 나누어

등사실(지금은 인쇄소 같은)과 함께 했던 ] 한 귀퉁이에 이젤을 펼 수 있는 공간을 아무 조건 없이

내어주셔서 결혼을 해서도 군인인 남편이 긴 출동을 가면은 남산만 한 배를 안고서 가서 작업했고,

둘째 아이를 낳고서도 5년 넘게 일 년이면 한 두 차례 가서 큰 작품을 하고는 했었다.

  겨울엔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코끝이 시려웠고, 여름엔 문을 열지 못해 덜덜거리는 선풍기

하나로 버텼고, 칸막이 사이로 들리는 등사실의 등사기 돌아가는 소리와 학생들 떠드는 소리가

한 밤중(야간 중, 고등학교도 있어 )까지 이어지던 그 조그만 미술실을 내어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억척스럽게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선생님께서도 그 시절에 여러 가지로 참 어려우셨는데도

작업하러 가고 싶다고 전화를 드리면 언제든 공간을 내어 주시고 지켜봐 주셨기에 어렵고 힘이 들고

절망스러운 때에도 그림의 끈을 놓지 않게 해주셨던 고마운 선생님!!

  그 선생님께 잘사는 모습을 보여 드렸어야 되는데........

 

   오랜만에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얘기를 하고 나니 조금은 나의 처지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이 되면서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법정 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바라보는 기쁨에 대하여 이렇게 쓰셨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다. 너무 가까이서 자주 마주치다 보면

비본질적인 요소들 때문에 그 사람의 본질(실체)을 놓치기 쉽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받쳐 주어야 신선감을 지속할 수 있다.”라고 했듯이  선생님이 나를 지켜봐 주시고

바라보는 기쁨을 드려야 했는데 하는................

 

 

 

 

    **정물: 미술실에서 내가 가지고 간 소도구들을 이용해 처음으로 그렸던 작품이다.

            1980년이 가고 ‘81년이 시작되던 겨울! 교실은 솔솔 들어오는 바람에

            몹시 추웠지만 그리려는 열망은 뜨거웠던 날에 그린 작품,

          

           *** 슬라이드 필름이 뒤집어져 인화가 앞뒤가 바뀌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