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에세이140
2009-12-27
명제: 꽈리 1991년 작 10F Oil on canvas
조금 전까지도 조용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부슬부슬 싸리 눈이 조용히 내린다.
그러다가 점점 눈뭉치들이 커지더니 급기야는 함박눈이 되어 도로를 하얗게 만들어 버린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로에 차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눈에
도로는 금방 설국의 나라로 변했다.
언덕 빼기가 있는 교차로엔 승용차들이 엉키기 시작하고 큰 차, 작은 차 할 것 없이 차들은
엉금엄금 기어가기 시작한다.
버스 안의 풍경은 한낮에 내리는 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포근하고 낭만적이며
삭막한 도시에 내려주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도로에 있는 차들은 시야가 보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미끄러워 눈과의 전쟁 시작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은 자연의 리듬에 따라 오는 것이기에 당연한 것이고 순리임에 틀림없다.
자연은 스스로 정화도 하며 채우기도 하고 순간순간마다 새롭게 배경이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사색의 장이 되게 하고 꿈을 꾸게 하고 희망을 갖게도 하지만 자연과의 싸움이라 할 만큼
사투를 벌이게도 한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아름답고, 살벌하고, 삭막한 배경이 된다고 해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도 자연이 갖는 고유를 버리지 않고 순리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특성에 맞게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하고 지난다.
보는 이의 배경이 되어 삶을 풍요하게도 해주고 쓸쓸하게도 하는 자연은 보는 각도에 따라
아름다운 비밀의 화원을 펼쳐주는 것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작업실로 오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노라니 엊그제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성탄전야미사 구유경배예절시간에 성가대석에 앉아 성가를 부르며 제대 앞에 모셔져
있는 구유에 누워계시는 아기예수님을 내려다보며 지나온 날들을 묵상하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답답하고 무기력한 아들의 모습이 겹쳐지니 희망을 안고 꿈을 주러 오신 아기예수님의
환한 모습 과 대비되어 통곡이 되어 버렸다. 꿈도 희망도 목표도 상실한 듯 살고 있는 아들을,
그리고 딸과 나의 앞날을 봉헌하며 올 한 해 동안 스쳐지나간 사람들과의 시간과 생각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끝없이 울었다.
다음날 성탄미사를 보고 화실에 와 울다 지쳐 잠을 자다가 때맞춰 찾아준 친구와 이른 저녁을
먹었다. 집에 가야겠다는 나를 위로 한다며 집에 데려다준다기에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와
동호대교를 지나니 눈이 하나 둘 바람에 실려 날렸다.
아주 작은 눈발이었지만 올겨울에 맞는 첫눈이어서 사람구경하면서 가자고 의논을 하여
수많은 작은 알전구들이 반짝여 환상적인 시청 앞 광장으로, 광화문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까만 행렬들을 바라보며 삼청동으로 그리고 북악스카이웨이 로 차를 몰았다.
아파트가 북악스카이웨이와 접해 있어 마음이 울적하거나 비가 촉촉이 오는 날 숲길을
달리다보면 살아있는 생명의 꿈틀거림을 볼 수 있고 초록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숲의 내음을
맡기도 하고, 잎이 져버린 빈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충만함을 바라보고 밤에 펼쳐지는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보며 내 안에 별빛의 꿈도 간직하며 살아 움직이는 자만이 자기
자신을 개조 할 수 있다고 다짐했었다.
가끔은 팔각정에 올라가 커피 한잔 뽑아들고 멀리보이는 도봉산과 북한산을 바라보고
내려다보이는 정릉이며 우이동계곡을 보면서 혼자 행복해하며 홀짝이다 화실에도 가고 집에도
가는 혼자서도 잘 다니는 길에 동행이 있어 따뜻한 차 한 잔을 안마실수 없었다. 텅 비어있다
시피 한 찻집에 때가 때인지라 사람들이 많았다.
창가에 자리하나 비어있어 대추차 한잔을 마시며 바람에 휩쓸려 몰려가다 멎으면 쌓여 형태를
나타내는 눈을 바라보며 예전에 대만에서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이층버스 안에서 꼼짝없이 갇혀
도로에 비바람이 살아서 몰려다니던 태풍의 모습이 생각났다. 바람의 형상을 난 그때 처음 보았다.
더 쌓이기 전에 내려가자고 나섰는데 산위라 추워서인지 살포시 눈이 덮어 있었다.
서울에서의 눈길을 얼마 만에 가보는 것인가? 고요히 내리는 눈이 아름답고 차창에 부딪치는 눈
소리가 좋아서 침잠하던 마음이 밝아졌다. 인적이 없으니 천천히 저속기어로 내려가는 길에 눈이
점점 굵어져 쌓이기 시작해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넘으니 내려가는 커브 길에서
비상등을 켜고 서있는 차가 보였다.
피하려는데 차가 미끄럼을 탄다. 어! 어! 하는 찰나에 뒤 범퍼를 박고 서버렸다.
차에서 내려 서로 확인하려는 순간 차한대가 슬슬 밀려와 우리 차를 스치고,
그 뒤에 오던 차가 또 박아 앞차 옆구리를 박고 서버려 우리 차는 갇혀버렸다.
통제 할 시간도 없이 하나 둘 천천히 내려오던 차들이 슬로모션 하듯이 내려가다 멈춰서고,
큰 차를 뽐내며 운전에 자신있어하는 차들이 지나가다 저 앞에서 퍽! 퍽! 하고 몇 대씩
부딪치며 멈춰 선다. 짧은 시간에 장난감 차들이 놀이하듯 십여 대의 차들이 서로 엉겼다.
보험회사와 견인차량을 불러도 차들이 못 올라오고 사람들만 낑낑거리며 걸어서 올라왔다.
구청에서는 제설차량을 풀가동시켰다지만 올라오는 기미는 안 보인다.
시간은 마냥 흘러가서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추워져 발이 시려오는데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몰라 시동을 걸 수가 없다.
눈은 하염없이 부슬부슬 내렸다. 낭만적이고 아름답던 눈이 무섭고 아귀처럼 내게 달려오는 것
같아 싫고 나 때문에 친구차가 망가진 것이 미안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 길을 다니면서 좋다!
하면서 매번 다닐 적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좋은지요! 하고 다녔었는데........
밤 11시가 다되어서야 밑에서 경적이 울리며 제설차가 올라왔다. 뒤에 경찰차도 체인 소리
요란하게 철거덕 거리며 올라온다.
제설차가 지나간 자리는 금방 눈이 녹아내린다. 세상에!! 꼼짝 않고 반짝이며 위용을 뽐내던
하얀 눈들이 염화칼슘이 뿌려지자 순식간에 사라지고 까만 아스팔트가 드러났다.
죽은 듯이 있던 엉켜있던 차들이 하나 둘씩 순서대로 내려간다.
아예 시동이 꺼져버린 차들은 그 자리에 죽은 듯이 서있고 차 안에 있던 담요와 시트를 걸치고
내려가는 젊은 커플들을 바라보지만 무슨 상황이 앞에 전개 될지 몰라서 태워 줄 수가 없다.
아파트를 뺑 돌아 집 에 왔다. 씻고 자리에 누웠지만 처음 당해본 일인지라 충격이 큰 탓인지
자꾸 오버랩 되어 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 자신에게 속상하고 친구에게 미안하고
자연이 주는 두려움과 무서움이 누워 있다가도 깜짝 놀라 일어나 한참이나 까만 벽을 멍하니
바라보게 했다.
온갖 것에 눈이 멀어 허겁지겁 살아온 한해의 마지막을 좀 더 자신을 들여다보고 겸허하게
정리하며 자연을 바라보라고 눈이 내게 전하는 작은 경고인 듯 했다. 빈가지에 살포시 쌓여있는
설화를 보면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나뭇가지이기에 거기에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난 것처럼
살아온 날들을 결산하며 또 다른 한해를 살아내라고, 온 몸으로 느끼고 보고 알라는 듯 내게
전하는 의미였다.
지금은 눈이 그쳤다.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하얀 눈길은 수많은 발자국의 사연을 안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 꽈리: 많은 얘기들을 담고 빨갛게 물들어 있는 꽈리의 모습이 긴 겨울 밤 의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담는 듯하여........
위 그림과 글은 女流畵家 丁蘭淑이 119편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중단하였던 <그림이 있는 에세이>를
작년 봄 다시 쓰기 시작하여 知人에게 틈틈이 보내고 있다. 120편부터 여러 벗님과 함께 보고 읽을
기회를 갖도록 오늘은 작년 12월 27일 받은 140편을 올린다. 돔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이 있는 에세이142 (0) | 2010.03.19 |
---|---|
그림이 있는 에세이141 (0) | 2010.01.16 |
강종열 화백의 동티모르 사랑 (0) | 2009.11.14 |
그림이 있는 에세이139 (0) | 2009.11.07 |
그림이 있는 에세이138 (0) | 2009.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