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그림이 있는 에세이158

뉴도미닉 2011. 2. 16. 10:13

             2011-01-16

          그림이 있는 에세이158 

           

       명제: 해질 녘 1981년 작 10F Oil on canvas

           작가:  정란숙

 

            모처럼 광주에 내려간 김에 우 선생님께 새해 인사 겸 전화를 하고 찾아뵈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니 햇수로 31년째다. 어쩌다 전시 소식이 있거나 해가 바뀌면 연하장으로 소식을 전하고, 간간히 서로의  

            안부를 전화로 확인했던 세월이 참으로 질기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이제 70 고개를 넘으셨다. “어떻게 사냐?

            힘들지만 잘살고 있어야!” 하시며 선생님은 이제 설렘도 없어지고 작업도 힘에 부치다 하시며 내게 자료 정리하는

            것과 작품을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에 대해 당부하셨다. 선생님은 개인 미술관을 지어 멋지게 운영을 하시고 자료도

            엄청나게 보관하시고, 정리를 잘해두신 것을 잘 알기에 말씀 하나하나가 마음에 새겨진다. 

 

            1980년 겨울이 올 무렵 금남로(광주광역시의 도로 명) 옆 골목, 백제 화방 앞에서 우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여동생

            의 학교 미술 선생님이기도 하셨지만, 서울에서 선생님들께 우 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기에 선생님을 뵙자

            마자 인사를 꾸벅하고 그림을 그린다고 했었다. 그림을 그릴 공간이 없다는 나에게 아는 선생님 화실을 소개해주셨

        는데 내가 적응을 못 하고 화실비를 걱정하자 학교 미술실 한 귀퉁이를 내주시며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다. 교실

            한 칸을 둘로 나누어 등사실과 함께 썼던 반쪽 미술실....... 

 

           1980년 늦가을, 서울에서의 생활이 힘들어 보따리 싸들고 무작정 집으로 내려와서는 내가 있어야 할 공간도 없고,

           작업 할 공간도 없어 많은 방황을 할 때였고, 프랑스 르. 살롱전에 내 작품이 선정되어 그림을 그려 보내야 할 때여

           서 춥고 좁은 미술실이지만 얼마나 고마웠던지 조그만 석유난로로 몸을 녹이며 라면을 끓여 먹으며 작업을 했었다.

           선생님은 비구상을 하시는 분이라 내 작품에 전혀 관여도 안 하셨지만,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이 있으셔서 수업

           이 끝나면 미술실에서 작업하시다 먼저 퇴근하셔서 혼자 늦은 밤까지 열심히 그렸었다. 상업계 학교라 야간 학교도

           있어서 작업하다가 밖을 내다보면 불이 환히 켜진 교실들과 학생들의 소리에 컴컴한 이쪽 교실의 무서움을 덜어낼

           수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도 화풍은 구상이 대세였고 특히나 광주는 (고) 오지호 선생님의 영향이 큰 관계로 비구상은

           발붙이기가 힘든 터에 선생님은 비구상으로 막 알려지기 시작하셨고 지금은 훌륭하게 성공을 하신 분이다. 서로가

           힘들고 외로운 작업이었고 시간이었기에 작업하다가 쉬는 틈에 서로의 생각이나 작업에 대한 방향을 이야기하며

           차를 홀짝이기도 하고 김치 한쪽에 라면을 훌훌 먹으며 그해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4월, 삶에 도피하듯 결혼을 하고

           광주를 떠나 군인도시 진해에 살면서 작업에 대한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고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의 방향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이 안 서면 선생님께 편지를 써서 의견을 여쭙고는 했다. 

 

           결혼으로 도피해 작업의 끈을 놓았던 그해 6월 프랑스로 보냈던 작품이 금상을 받았다는 것을 신문을 보고 우리나라

           에서는 인정을 못 받아도 외국에서는 편견이 없어 작품으로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아!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며 다시

           붓을 잡기 시작했었다. 큰아이를 임신해 배가 남산처럼 부풀어 있을 때도, 둘째를 임신했을 때도, 남편이 훈련이다

           출동이다 해서 몇 달씩 집을 비우면 아이들을 들쳐업고 친정으로 가서 선생님이 내어주신 미술실 한 귀퉁이에 이젤을

           펴고 100호, 50호 큰 작품 하나씩을 만들어 고속버스 짐칸에 싣고 진해에 가고 서울에 전시하러 다녔다. 일 년이면

           3분의 2는 집을 비우는 남편도 억척스레 그림을 그려오는 내게 조금은 안심? 도하고 혼자 애들하고 보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도 엷어져서 좋아 했다. 일 년에 한두 번은 가서 작업하며 그림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던 4~5년

           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연륜이란 단숨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심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게

           관심을 두고 마음에 담고 살았기에 시련이 와도 큰 슬픔이 왔어도 붓을 꺽지 않았고 좋은 작업을 하려고 애썼기에

           선생님을 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고 선생님께서 지켜봐 주신 덕택에 좌절하지 않고 그림 그리는 여자로 홀로

           서기를 할 수 있었다. 여름 협회전시 때 다시 뵙자면서 찻집을 나와 눈이 쌓인 도로를 걷는데, 선생님과 처음 만났던

           화방도, 찻집도 세월이 흐른 탓인지 없어지고 조금은 을씨년스런 예술의 거리엔 인적도 없었다. 이른 저녁인데 너무

           추운 날씨 탓인가?

 

 

           ** 해질 녘: 선생님 미술실에서 처음으로 그렸던 작품이다. 지금처럼 컬러 사진이

                           흔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흑백사진으로 찍었었다. 이 작품을 진해에서

                           군의관으로 친하게 지냈던 가족이 사갔다. 시골생활을 해 본 적이 없어 서 걸어놓고 보고 싶다고........

                           그래서 슬라이드로 찍어놓지 못했다.

                           화가로 인정되어 처음으로 팔았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