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11
그림이 있는 에세이155
명제: 고요 2010년 작 20F Oil on canvas
산에는 어젯밤 눈이 왔었나 보다. 간간이 산기슭이나 응달에 잔설이 녹지 않아 발을 헛디디면 쭈~욱
미끄러진다. 양손에 거머쥔 스틱에 힘이 잔뜩 들어가지만 내려다보이는 산은 참으로 적막하고 고즈넉
하다. 빈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불암산, 수락산도 보이고 도봉산의 능선도 보인다. 산은 비어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주며 모든 것을 품어주는 아량을 베푸는 것 같다. ‘산이 저기 있어 오른다.’라는 말
처럼 북한산이 가까이 보이는 동네에 살게 되면서부터 바라만 보는 산이 아니라 본격적인 산행을 하게
하고 점점 그 속에 들어가 온몸으로 기를 받아들이고 마음을 쉬게 하며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산은 말없이 나를 받아주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의 영토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바람의 신선함에 설렘을 느끼며 산의 향기도 맡고, 산이
내게 들려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꼼짝 않고 있으면서도 온갖 것을 다 품고 지니고 있다가 자신
에게 다가온 사람에게만 살며시 내어주는 풍경과 여유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자연의 침묵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게 한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 같은 바위 틈새에 서 있는 소나무의 나무 등걸
이며 빈 가지로 묵묵히 서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노라면 내 안에 꿈틀대던 욕망이나 허접스런 생각들을
붙들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하고 부끄럽게 한다.
모든 것이 꿈틀대는 봄의 산이 아닌 겨울 산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꾸미지 않은 제 모습을 보여주고
스스로를 바라볼 줄 안다. 봄날의 풋풋함과 화려한 꽃들로 만개한 모습에서 여름날의 싱싱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열매를 맺고 결실을 가져오는 것들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떨어낸 그 자리에 서서, 또다시 올 봄을
기다리며 삭풍을 견디는 의연함이 있다. 그리고 겨울 산은 말이 없다. 마치 침묵의 의미를 아는 것처럼....
작업을 하다 쉬는 틈에 걷기를 하러 나섰던 작업실 근처의 매봉산이나 대모산을 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산 맛’을 느끼게 하는 북한산은 둘레길이 생기고 산책로가 있어서 집에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뒷산에 오르는
기분으로 천천히 사색하며 다닌다. 아파트 뒤로 북악스카이웨이가 연결되어 있어서 여름에는 늦은 밤에도
가볍게 산을 거닐 수 있어서 여기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숲은 잠들어 고요
하고 적막한 까만 밤에, 산 아래 동네의 불빛을 바라보며 저 아래 인간 세상은 온갖 불빛과 소음으로 쉬지
않고 있고 깨어 있고, 나 또한 깨어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오늘은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북악스카이웨이로 걷다가 형제봉을 오르고 그리고 대성문 앞을 지나 평창동
둘레 길로 내려왔다. 그동안 정릉에서 우이동으로 그리고 도봉산에서 사패산으로 내려온 길들은 계곡도 있고
여기저기 쉼터도 잘 만들어놓아서 나름대로 운치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조용히 사색하고 걷기에 적합
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없이 올라가고 내려와야 해 재미가 없었는데 이번 산행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낙엽이 깔린 소로가 있는가 하면 로프를 당기며 올라가고 내려와야 하는 바위능선도 있는 아기자기한
길과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등산을 하는 재미가 있고 지루하지가 않았다.
4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걸어 내려와 말로만 듣던 평창동 주택가를 지나치며 산 아래 펼쳐지는 풍경에 놀라고
예쁘게 지어진 집들의 규모에 놀라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하고 내려와 인사동 미술관에 갔다.
연말을 맞아 독거노인들을 돕자는 취지로 몇몇 선생님들과 소품전시를 하고 있는 중인데 궁금하여 (집에 가서
씻고 나면 쉬고 싶을 것이기에) 등산복 차림으로 곧장 갔다. 작품을 하느라 1달 가까이 밤잠을 안자며 그
동안 게으름 피운 것에 보상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끝내고, 병이 나 몇 날을 링거액을 맞고 날마다 누워 지내다
모처럼 산에 다녀와 전시장에 갔다. 토요일 오후라 사람들은 많이 들락 거렸지만 쉽게 작품 구입을 하려는
사람은 없다. 들고 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산을 내려오며 바라봤던 평창동 집들과 연탄 한 장 살 돈이 없어 추운
겨울을 지낼 외로운 노인들의 집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명제 : 고요
바구니도 비워놓고, 여백도 깨끗하게 비워놓았다.
때로는 비어 있는 것이 꽉 채워놓은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침묵의 의미를 알기에 ........
그림에 글을 실은 作家 丁蘭淑이 119편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중단하였던 <그림이 있는 에세이>를
2009년 봄 다시 쓰기 시작하여 知人에게 틈틈이 보내고 있다. 여러 벗님과 함께 보고 읽을 기회를
갖도록 오늘은 155편을 올린다. 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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