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22
그림이 있는 에세이187
그림/글: 작가 정란숙 명제: 환희 2012년 작 4F Oil on canvas
새벽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잠이 깨어 여기저기 창문을 닫으며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계양산과 들이 촉촉하게 비안개에 젖어 있는 모습이 한 폭의 실루엣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
워 한참을 쳐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이곳 김포로 작업실을 옮긴 지 오늘로 20일째다. 10년 동안,
번화하다는 역삼동에 멋모르고 작업실을 옮겨와 외로움을 달랬고, 나름대로 세상살이에 적응해
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글로 써왔고, 작업도 하면서 참 오래 살았었다는 생각을 했다. 정도 많이
들었었다.
나라에서 무상으로 빌려준 창동 창작스튜디오 1기 작가로 14명 중의 한 명으로 뽑혀 모든 슬픔과
근심을 잊고 수많은 작가 속에서 전 문화관광부 소속 국립현대미술관이 관리하는 작가가 되었다
라는 기쁨에 작업을 하고 지내다 기한이 다 되어 후배작가들에게 물려주고 나와야 했을 적에 다른
작가들은 모두 넓은 작업실을 찾아 시 외곽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는 너무 외롭고 사람이 그리워
친구들도 있고 사람냄새가 날 것 같은 역삼동으로 옮겨와 문 닫으면 수도원이고 절간 같은 곳에서
혼자 지내는 방법을 터득하고 아픔도 삭이면서 하느님을 내 마음에 담는 일도 열심히 했었다.
들어갈 적에는 텅 빈 공간이 많이 있었으나 이사 올 무렵엔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작품이 싸여
거의 포화상태였으니.......... 집을 비워달라는 주인의 말이 없었어도 내년쯤엔 넓은 공간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뜻하지 않게 집도, 작업실도 한 달 사이에 옮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뭣이든 닥치면 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집을 구하고 작업실을 구하러 다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어디서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 것인지 막연하기만 했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나는
출발 선상에서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며 머뭇거리고 갈팡질팡하며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슬퍼했었다. 닥치면 순간순간마다 헤쳐나가고 누릴 줄도 알건마는.......
그동안 살았던 둥지를 옮겨 또 다른 둥지로의 떠남은 내 삶에 커다란 변화를 주는 것임이 틀림없다.
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먼 훗날 누구나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는 ‘언젠가’가 지금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지금’을 통해 오듯 새 삶을 찾기 위함이
아닌가? 또한, 자기로부터 벗어나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공부를 하는 것이라 생각을 해봤다.
어느 것은 버리고 어느 것은 다시 주워담아 또 다른 자아를 위해 담아놓은 것처럼 .....
원하진 않았으나 처한 상황에서 맺고 끊을 줄 아는 의지가 필요하고 여기까지 오게 한 절대자의
깊은 뜻을 살아가면서 헤아리기로 했다.
비가 올 적에 작업실 짐을 옮기다 보니 바닥과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던 곳이 앵글을
조립해서 작품 정리하고, 벽면에 작품도 걸고 책도 정리하고~~ 어제는 식탁을 들여놓으니 이사한
지 19일 만에 정리가 다 되어 소파에 길게 앉아 책을 읽다 잠이 들었었다. 오랜만에 주어진 달콤한
휴식이었고 내게 준 자유였다. 삶의 조건은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바람이 살랑거리며 분다. 근처 놀이터에서 애들이 공놀이를 하는지 소리가 부산하다. 사람이 사는
동네 같다. 너무나 조용해서 이곳이 아파트인가 싶었는데....... 오전에 한바탕 무섭게 쏟아지더니
지금은 언제 비가 왔느냐 싶게 하늘은 맑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아직은 생소해 불편
하고 집도 멀어 훌쩍 갈 수 없지만, 생각보다 교통도 편하고 (내년에 전철이 들어오면 더 낫겠지)
무엇보다 공기가 맑고 시원해 이 더위에 선풍기가 필요 없다. 좋지 않은 내 호흡기에 많은 도움을
줄 것 같고, 작업 공간이 넓으니 큰 작품도 할 수 있어 건강만 허락하면 얼마든지 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또 다른 나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인생에 본래 주어진 의미는 없다고 한다. 다만 누구든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만큼의 의미가 생겨난다고 한다. 나 역시 또 다른 의미를 붙잡고 만나는 많은 관계를 따뜻한
말로 만들어 가다 보면 내 안의 삶도 풍요해지고 내가 만들어가는 많은 이야기가 아름답고 풍요
로워질 것이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임으로.
** 환희: 봄날 무더기로 피어나는 꽃들의 합창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환희라 했다.
내 삶의 또 다른 전환점인 이곳 김포에서의 삶이 환하게 펼쳐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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