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원한 친구의 방한[訪韓]
"How many bottles of beer can you drink?"
"Five or six."
우습게 들리겠지만 내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취업할 때
면접관이 나에게 물었던 첫 질문이고 나의 대답이었다.
1971년에 우리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면접관이 지난 10월 2일 한국을 다시 찾았다. 6.25사변 때 미 해병대 병사로 참전했던
강원도 양구 펀치볼[Punch Bowl] 지역을 다시 돌아보고 나를 포함한 몇몇 친지를 만나고 싶어
80대 중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부인과 함께 한국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2011년 한국방문을 했을 때는
내가 직접 두 분을 모시고 양구, 속초, 통일전망대 등 명소를 여행하기도 했었으나 올해는
개인 사정으로 동행은 못 하고 두 부부만이 양구를 들러 을지부대를 방문하고 속초에서
쉬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이달 24일에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지난 19일 우리는 다시 만났다.
샤부샤부를 들자고 속초에서 장거리 전화로 연락이 왔기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들이 머무는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숭동에 있는 음식점을 찾아 예약한
불이아[弗二我]를 찾았다. '둘도 없는 우리'이라는 뜻을 가진 중국식 식당이다.
점심을 마치고 북악 스카이웨이를 드라이브하며 팔각정에 들렀다. 그가 잠시 살았던,
지금은 엄청나게 변한 세검정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옛 추억을 더듬는 그의 모습을 통해 청장년 시절의
그의 모습을 되새겨 보기도 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멋진 명콤비였었다.
그의 이름은 Abner R. Williams.
미국에서 한국에서 입양한 딸을 포함해 세 딸과 손자 손녀들이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살고 있다.
Georgia주 Atlanta시 북쪽에 있는 Marrietta시가 그가 사는 곳이다.
동대문을 거쳐 대학로 근처 弗二我가 있는 동숭동으로....
드디어 중국식당 弗二我에 도착!
불이아 정식 - 쇠고기와 양고기 샤부샤부
반은 보통 양념맛 - 다른 반은 사천식인 매운맛
얼마나 땀을 흘렸던지.....
맥주보다 '산사춘'을 더 즐거이 마시는 딕[Mr. Williams의 애칭]
돔 - Mrs. Williams - 진도화 - Mr. Williams
불이아 입구에서 기념사진
스카이웨이를 돌아 팔각정에 도착하니 시들어가는 꽃이 먼저 반긴다.
팔각정과 장승
팔각정 2층에서 북악산을 배경으로 노안의 미소가 곱게 피어오른다.
남쪽으로 보이는 남산과 시가지
창을 통해 북악산이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 씩...
북악산 아래 세검정 지역/청와대 옆을 지나며 본 시내와 남산타워
- 중국식당 弗二我와 스카이웨이 팔각정을 찾아 2013년 10월 19일 -
을지대대 정훈장교가 보낸 이메일과 사진
2011년 Mr. Williams가 그의 부인과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모시고 6. 25 사변 당시
그가 직접 참전했던 양구 최전방 지역과 속초를 다녀왔었다. 그는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를 잊지 못하고
올해도 양구[펀치볼 지역과 도솔산 지역]를 다시 찾아 주둔하고 있는 을지대대를 방문했다.
아랫글과 사진은 을지대대의 정훈장교가 Mr. Williams에게 보낸 것으로
그가 나에게 다시 보낸 내용이다[Mrs. Williams는 한국인이라 한글로 글을 쓴 것임].
을지전망대 오셔서 찍은사진 보내드립니다.
단어선택이 잘못된점 죄송합니다.
잘나온 사진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을지대대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을지대대 정훈장교 제작 -
한심한 난치성 위정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요즈음 또다시 국민을 웃기고 있다.
천안함 사건에 이어 연평도를 무자비하게 기습 포격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고
핵 개발 등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북한의 만행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6.25사변 당시 우방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미국에 사는 친구 Abner R. Williams의 한국계 부인 Mrs. Williams가 2010년에
한국 기자가 그녀의 남편을 만나 6. 25 참전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을 나에게 이메일을 통해 보내왔다.
그 내용 중 일부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돔에 다시 올린다.
....................
6.25 참전 용사 Abner R. Williams씨의 이야기
해병대 1사단 소속으로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고
1978년 제3땅굴을 발견하여 그 공로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51년 6월 6일 19세 나이에 부산에 발을 디딘 에브너 알 윌리엄스 씨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으로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자신이 속한 미 해병대 1사단 선배들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지 6개월 후 부산에 도착한
윌리엄스 씨는 4명으로 이루어진 소총수 팀의 사격지휘자로 도착한 지 2일 만에
춘천 근교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시작했고,
이어 현재 DMZ에 위치한 도솔산 분지에서 최대의 격전을 벌였다.
한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윌리엄스 씨는 당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던
도솔산 지형도의 등고선을 하나하나 짚으며, 북한군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
상사가 북한군의 공격에 의해 쓰러져 들것에 실려 후송되던 모습,
포탄이 떨어져 수많은 동료들이 숨진 비극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윌리엄스 씨는
"당시 적의 공격에 의해 쓰러진 동료를 구하려다 포탄이 떨어져
얼굴 전체와 팔에 파편이 튀어 피범벅이 되고 폭발음으로 인해 청력을 잃었다."며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고 말해 당시 전투의 긴장감을 상기하는 모습이었다.
윌리엄스 씨는
"전쟁 중 입은 상해를 두려움을 무릎 쓰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영예의 상처"
라고 하며 미 정부에서 상해 군인에게 수여하는 퍼플 하트를 소개했다.
1953년 5월 9일 약 2년간의 참전을 벌이고 미국으로 돌아온 윌리엄스 씨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으로 1969년 다시 한국땅을 찾았다. 엔지니어로 미군 부대의 도로, 비행장,
관사 등의 건축, 설계 업무를 맡은 윌리엄스씨는 약 10년간 한국 생활을 하며
한국 문화, 음식과 친숙해 졌다.
또한 윌리엄스 씨는 1978년 휴전선 근교 남방 지대에서 북한이 불법으로 구축한 제3땅굴을
발굴해 당시 노재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윌리엄스 씨는
"1970년대 한강에는 다리가 한 개 뿐이었고 한남동에서 한강을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었다“며
“한국이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에 대해 감탄한다."
라고 기뻐했다. 한편,
"한국을 방문하면 참전용사 기념비를 비롯해 당시 전쟁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을 찾아간다."
라는 윌리엄스 씨는
"한국인들은 오히려 전쟁의 역사를 잊고 사는 것 같다."며,
"설악산에 가는 한국인 가운데 관광지를 찾는 사람은 많아도 참전용사를 기념하는
전적비를 찾는 사람은 없다."
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윌리엄스 씨는 당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용감히 싸웠던 한국 해병대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윌리엄스 씨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며
"지금 대한민국이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시 많은 군인의 희생과 피로 얻어진 것."
이라고 강조했다.
윌리엄스 씨는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명언을 되새기며
"이번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자유의 가치를 깨닫고 안일함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라고 충고했다.
또한, 윌리엄스 씨를 비롯한 해병대원들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에서 희생한
180명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오는 11월 워싱턴에서 기공식을 가질 예정이다.
김효진기자 hjk@atlantachosun.com
Abner R. Williams씨 ▼
▲ 에브너 알 윌리엄스 씨가 미 정부가 수여한 퍼블하트와 한국정부가
수여한 감사장을 보이고 있다.
▲ 한국전 당시 같은 소총수 팀 동료와 찍은 사진
[오른쪽이 에브너 알 윌리엄스 씨]
▲ 에브나 알 윌리엄스 씨가 도솔산 등고선을 짚으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
▲ 한국전 참전 용사로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로부터 받은 메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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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프리트 미 8군사령관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의 이야기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기수[機首]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 편지는 워커 장군의 후임이었던 릿지웨이 장군이 맥아더 장군이 해임됨에 따라
UN군총사령관으로 영전한뒤 그 후임으로 부임한 벤프리트 미 8군사령관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해외 근무를 마쳤음으로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여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리고 그 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2일...
이 훌륭한 군인은 압록강 남쪽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한 후 표적을 향해서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 8군 사령관 밴프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지미 밴프리트 2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 되었고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지미 벤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하다.”
라고 아버지가 아들 구출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접 한국군 부대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 명신 장군의 증언이다.
며칠 뒤 부활절을 맞아 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이 곧 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밴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을 벗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
나와 진도화 그리고 Mr. & Mrs. Williams의 기념사진
진도화 - Mr. Williams - Mrs. Williams - 돔
- 2011년 5월 방한 시 워커힐호텔에서 기념사진 -
- 2008년 방문시 양평 옥천 순두부집에서 -
- 2008년 양평 Hill House에서 -
- 워커힐호텔에서 -
- 워커힐호텔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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