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란숙의 그림이 있는 에세이 120

뉴도미닉 2009. 5. 25. 13:10

 

 우리네 삶은 모두 빈 바구니   

 기고문(寄稿文)

                                                                                             

정란숙(丁蘭淑)... 1985년 후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쌍중(崔雙仲) 화백으로 부터 칭찬과 함께 들어본 이름으로 <線과 色  紙上展>에 여자로는 두 번째 동인이 되신 20대 후반의 화가이셨다. 그 후 미모의 젊은 화가가 단란한 가정을 슬기롭게도 잘 꾸려나가다 졸지에 불어닥친 비운이 그녀 전업화가의 길을 모질게도 가로막곤 하였다.  그러나 믿음의 힘과 두 남매에 대한 모성애 그리고 굳은 의지는 그녀를 오늘날의 중견화가로 변모시켰다.

 

슬픔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그녀의 집념은 끈질기게도 대나무 공예품을 테마로 꽃과 과일과 수예품 등을 조화시켜 그린 그림과 다채로운 에세이가 벌써 119편....

피눈물 나는 노력의 대가이다.

 

그녀의 글을 읽노라면 변화무쌍한 자연의 조화, 자식 이야기, 일상생활에서 겪은 수많은 일을 진솔하고 적나라하게, 그녀의 마음을 훌러덩 다 풀어헤친 듯 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그림들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소박하고 꾸밈도 없이 아름다움이 넘치는 그림들이지만 그 속엔 수많은 애환과 사연들이 숨어 숨 쉬고 있으리라.

이 어려운 시절 '그림이 있는 에세이'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고 고난을 헤쳐나가 제2, 제3의 출간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線과 色) 명예회장  조 남 주

<책표지-그림이 있는 에세이- 정란숙 글.그림>

 

                                                                                                                                                                                                

 

위 글은 2008년 11월 19일 화단에 나온 지 30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우리네 삶은 모두 빈 바구니 - 그림이 있는 에세이>의 '출간을 축하하며'에 기고한 내용. 119편 중 71편을 골라 368페이지에 수록한 이 책은 꾸밈없는 정겨운 글과 그림들이 우리에게 무한한 감명을 준다.

 

화가 정란숙은 119편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중단하였던 <그림이 있는 에세이>를 올해 봄 다시 쓰기 시작 지인들에게 틈틈이 보내고 있다. 

120편 부터 여러 벗님과 함께 읽고 볼 기회를 각고져 블로그에 올린다.  돔

 

 

 

 

 

정란숙의 그림이 있는 에세이120

2009-03-16

 

 

   명제: 봄이 오는 길목 2002년 작 6F Oil on canvas


  한의원 다녀오는 길옆 가로수에 노란 솜털이 삐죽삐죽 나와 있는 산수유가 앙증스럽게 피어있었다.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리며  차가운 바람에 부스스 떨며 서있는 모습이 허리를 삐끗하여 날마다 침을

  맞으러 다니며 아픔으로 마음도 심란하고  날씨까지 을씨년스러워 스산한 마음으로 걷는데 가지 끝에

  노란 색으로 단장하고 있는 산수유를 보는 순간 내 가슴에 따뜻하고 환한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아 허리의

  통증도 어깨 결림도 나아진 듯하고 걸어오는 동안 내 눈의 잔상에 어른거리는 노란 색 밝음이 마냥

  좋았다.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봄은 이렇게 소리 없이 부지런히 길을 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길을 내며 우리에게 오는 봄은 그 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벌과 나비에게도 꽃에게도 나무에게도 따뜻한 훈김을,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나도 봄처럼 소리 없이 누군가의 가슴에 따뜻한 빛이 되어 줄 수 있고

  아름다운 길을 내어 내가 걸었던 길을 기쁘게 걸을 수 있게 할 수 있는 삶일까?

  기다림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 그리고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누군가에게 훈훈한

  향기를 내뿜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동안 에세이를 쓰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끝은 쉽지만 시작은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지낸 많은 날들

  이었다. 방학도 아니었고 긴 겨울이었다 하기도 그렇고.......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가? 에 대한 막막함이 나를 두렵게 했고, 활자화 했을 때 나에게

  오는 책임이 그냥 글로 있을 때와는 다르다는 생각에 막연한 두려움과 실체를 알 수 없는 망설임이 이렇게

  긴 시간이 되어 버렸다.

  전시를 하고 책을 출간 하면서 느꼈던 기쁨도 있었지만 다 이루었다는 허무감과 사랑하는 아이들과 성지

  순례를 하면서 느꼈던 나의 존재감에 대한 무력감이 더해져서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았던

  고통을 강요받고 외로움을 견뎌내는 방법을 모르면서도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노력을 다 했다는 생각에 후회도 없거니와 다 살아버렸다 하는 마음이 들어 서럽던 생각도 죽을 것 같던

  고통도, 분노도, 두렵고 무섭게 다가왔던 아픔도 모두가 감사한 생각에 나는 아무것도 아님니다 ”성가에

  나온 노랫말을 날마다 중얼거리며 지냈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지 않고 글 도 쓰지 않고 날마다 내게 오는 시간과 내게 오는 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으로

  담고 눈으로 보고 나에게 오는 많은 사랑에 쩔쩔 매면서 배우지 못한 사랑과 받아보지 못한 사랑에 서툴러

  실행에 옮겨야지 하면서 우물쭈물 시간을 보내며 내 가슴이 가야 할 곳을 안내 해줄 꿈을 기다렸었다.

  꿈이 이루어내는 결과보다 또 다른 꿈을 꾸며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다보면 내가 걸었던 길이 누군가의

  가슴에 봄이 되어 줄지 누가 알까? 

  누군가의 가슴에 소통의 길이 되어 준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일이고 나의 욕망이나 꿈을 바라보며 그리고 나를 직시하며 나를 성찰하는

  것이기에 차분히 책상 앞에 앉아 나를 바라보기가 싶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간섭 하지도 않을뿐더러 관리

  또한 해주지 않기에 나에게 주어지는 숙제도, 꼭 해야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전시기간이 다가와 작품을

  해야 함에도 이제는 하고픈 전시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은 당분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득 담으려는 마음속에 절대자를 향한 마음 또한 자리 잡을 수 없으니 마음을 비우려 노력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잘 버리며 선택이 아닌 결단을 내리면서 살고 싶었다. 모든것을 내 스스로 찾아서 다시

  해야 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그동안 누리고 지냈다.


  행여 그동안 글이 올까? 하고 기다린 사람들이 계실까? 개구리도 깨어난다는 경칩도 지났으니 긴 겨울잠

  에서 깨어난 글이 올까? 하며 기다리는 분이 계셨을까?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이야기, 왕자가 여우에게 "언제나 같은 시간에 오는 게 좋아 이를테면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 질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4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 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될 거야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하는지 모르잖아. 기다림이 필요 하거든”의 말처럼

  일주일에 한편씩 받아보며 글을 읽는 순간만은 나를 기억 해주고 잘 지내고 있구나!!하는 바람으로 기다렸

  다면,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 글 도 쓰고 그림도 그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면, 잔잔한 기쁨으로

  기억 되지 않을까 한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생명을 가지게 된 존재들이 왜? 생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보살피고 보살핌을 받으며

  기다리고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가야 하는 까닭은 그 안에‘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관심이라는 사랑! 생의 모든 문제는 사랑에서 시작된다.

  나도 다시 마음을 열어 사랑을 해야겠다. 기다림이 헛되지 않게.......



  봄이 오는 길목**** 반닫이 위에 하얀 레이스를 깔고 하얀 카네이션을 담은

                      바구니를 올려 보았다. 레이스가 주는 정갈함과

                      하얀 꽃이 주는 밝음이 상큼한 느낌을 준다.

                      내 작업실에 마음 가득 봄을 옮겨 보았다.


                                            2009-03-16

                                            그림이 있는 에세이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