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에세이를 올리며
작가 정란숙이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인 청산도에서 동료 작가들과 지낸 4박 5일 동안에 있었던 '연휴사생회'의 이런저런 일을
스케치와 함께 글을 보내왔기에 서편제의 삽입곡 중의 한 곡인 '길'을 소리꾼 김명곤[유봉 역]과 오정해[송화 역]가
고수 김규철[동호 역]의 북장단에 맞추어 길을 걸으며 부른 진도아리랑을 배경음악으로 올린다.
그림이 있는 에세이196
2013-08-26
글/그림: 작가 정란숙 명제: 청산도에서 2013년 종이에 스케치 (펜화)
떠돌이 가족이 굽이굽이 펼쳐지는 보리밭 사이로 난 돌담길을 내려오면서 구성지게 부르던
진도아리랑 가락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길을 내려다보면서 선생님들은 삼삼오오 나무 그늘에서
이젤을 펼쳐놓고 파라솔을 펼치고 그림을 그린다. 한여름 뙤약볕이 이글거리는 속에서 캔버스에,
화첩에 풍경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간간이 관광객들이 해설사와 함께 우르르 와서
잠시 머물다 또 그렇게 우르르 버스를 타고 떠나간다.
현대사생회에서 주관하는 연휴사생회가 4박 5일 일정으로 서편제 촬영지로 유명한 청산도에서 있을
예정인데 선착순 40명이라고 공문이 뜨자마자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었기에 부리나케 비용을
입금했었다. 4시간 만에 정원이 마감됐다는 소식을 듣고, 작업실에서만 작업하는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이삿짐 같은 화구와 옷 가방을 빽빽이 실은 버스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 해남을
거쳐 완도 대교를 넘고 여객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와 함께 청산도 도청항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인생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지 않으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방향도 보이지 않는다. 머나먼 이국땅으로 갈 것인가, 가까운 대륙으로 갈 것인가 선택에 따라
뱃머리가 향하는 곳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뱃전에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보며 멀어져가는 완도를
바라보았다.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된 청산도는 바다 내음이 나지 않은 푸른 바다와 푸른 산,
구들장 논, 돌담장, 슬로길 등 느림의 풍경이 가득해 삶에 쉼표를 그릴 수 있는 섬이라고 하는데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들 사이로 그림 같은 푸른 슬레트 지붕과 주황색 지붕들로 어우러진 마을들이
보였다가 사라지고 켜켜이 쌓아놓은 구들장 논에서는 벼들이 초록색 향연을 뽐내고 있었다.
넓은 바다와 하늘, 푸른 들이 펼쳐지는 풍경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며 그림을 그리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생각을 하게 한다. 자연이 주는 넉넉함과 뜻이 맞아 함빡 웃음을 웃게 하는
동료들의 정답게 느껴지는 포근함에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의 의미를 찾는다. 혼자만의 작업실에서 느끼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많은 선생님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은 내가 또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인연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해준다.
작가의 집과 펜션을 통째로 빌려 한방에 예닐곱 명 식(우리 방은 9명이 잤다)자면서 밥은 슬로푸드
체험관에서, 도청 항 근처의 식당에서 먹으며 종일 작업을 하고 밥을 먹고 들어와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나와 긴긴밤을 촛불을 켜놓고 단합대회도 하고, 방에서 선생님들의 얘기에 배가 아프도록
웃으며 종일 그림을 그리며 지친 심신을 풀면서 함께 간 이 선생의 말대로 ‘혼자 작업하면
뭔 재미가 있냐, 이렇게 가끔 나와 스케치도 하면서 어울려 지내면 기쁘고 즐겁지 않냐’고
하는 말이 실감 나게 우리의 감정은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구체화 된다는 것을 느꼈다.
하루는 숙소 주변에서 그림을 그리며 밭에서 딴 호박 파 양파 깻잎 고추를 넣어 부침개도 해먹고
주인댁 할머니가 주신 옥수수도 쪄 먹으며 김치찌개 하나에 밥을 먹으면서도 오랫동안
함께 해온 사람들만이 갖는 서로 배려하고 신뢰로 똘똘 뭉친 우리 방 선생님들의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인생은 혼자가 아니고 더불어 가는 것이고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우고 또 비우며
바라보며 가야 하는 연속이기 때문에 나를 내세우지 않기에 즐거움이 있고 서로 보듬어 주려 했기에
기쁨이 있었다. 인생이란 그렇게 서로 채우고 또 비우며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길인 것 같다.
뚝뚝 떨어지는 구슬땀을 쿨 타월로 닦아내며 서편제 촬영지로 옛 돌담이 있는 마을로 그리고 잔잔한
바다가 보이는 마을로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우리를 취재하러 광주 KBS방송국에서
기획특집으로 촬영을 나와 우연찮게 리포터 스케치하는 것을 도와주며 인터뷰를 하는 영광(?)도 누렸고,
SBS 방송 모닝와이드에서도 촬영을 나와 사생을 하는 현장을 취재해갔으며 지역 신문사를
비롯한 연합통신에서도 취재하는 것을 보며 단체로 와 뙤약볕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나 보다는 생각을 했다.
환대해준 완도군에 사생에 참여한 모든 선생이 공동 작업을 해서 100호 작품에 44명이 사인을 해서
전달하며 만찬을 하고 44명 전원이 근처 노래방을 빌려 한바탕 잔치를 벌였는데 어쩜 하나같이
노래들을 잘하시고 흥이 많으신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좁은 길을 대형버스로 다니다 보니 차가
고장이나 서울에서 정비사가 와 고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나이 많으신 선생님들을 비롯해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 무사하게 사생을 마칠 수 있어서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해준 여행이었다.
내가 본 것을 다른 사람도 보고 있으며 그것을 다르게 표현해 내는 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놀라움은
내가 보는 산, 내가 가는 길, 내가 보는 풍경이 나만의 것이 아니고 모두의 풍경임을 겸허히
깨닫게 해준 나에겐 의미가 있는 여행이었다.
**청산도에서: 서편제 주인공 세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돌담길을 내려오는 길을
위주로 펼쳐지는 풍경을 스케치했다.
선생님들이 캔버스에 작업하실 적에 나는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하였다.
내 작업은 실내 작업이라 풍경을 스케치해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래서 많이 서툴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스케치하는 재미를 붙였으니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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